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종(고려 제3대) (문단 편집) == 기타 == >是歲天鼓鳴赦. >'''이 해([[946년]]) 천고(天鼓)가 울리므로 사면령을 내렸다.''' >---- >《고려사》 [[정종(고려 3대)|정종]] 원년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23816&categoryId=49629&cid=49617|기사]] * 《[[고려사]]》 정종 원년 기록에 [[수도(행정구역)|수도]]인 [[개성시|개경]] 하늘에서 천둥 소리가 들려 사면령을 내렸다고 하는데 이게 [[백두산]]의 화산 폭발로 인한 영향이 아니냐는 추정이 있다. 마침 여러 물리적, 정황적 증거를 통해 946년에 백두산에서 폭발이 일어났다는 주장이 신빙성을 얻고 있으며, 개경에서 백두산까지 470km 정도 떨어져 있지만 다른 [[화산]] 폭발 사례에서도 이보다 더 먼 거리에 위치한 지역까지 화산 [[구름]]이 뒤덮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충분히 영향이 있었지 않겠느냐는 것. * 이전부터 형 [[혜종(고려)|혜종]]과는 [[보위]]를 두고 대립하던 관계였던지라 혜종이 사실 병으로 붕어한 것이 아니라 시해당했고, 그 배후에 동생 정종이 있었다는 설까지 생겨나는 등 정종을 둘러싼 많은 [[음모론]]이 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 정종의 [[요절]]과 관련해서 후에 [[광종(고려)|광종]]이 되는 친동생 왕소와의 대립 끝에 시해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외가는 같았을지언정 정종의 후견인이 [[왕식렴]] 등 [[평양시|서경]] 세력이었던 반면, 광종의 뒷배경은 처가인 [[황주군|황주]] 황보씨였고, 이들이 연계되어 서로 갈등을 빚었다고 보는 설이다. 광종의 아내 [[대목왕후]] 황보씨는 태조와 [[신정왕후]] 황보씨 사이의 딸로 외가의 성을 따랐다. 실제로 후에 광종은 [[태조(고려)|태조]]의 4비 신정왕후 황보씨 소생 아우인 [[대종(고려)|왕욱]]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성종(고려)|성종]]에게 자신의 맏딸 [[문덕왕후]] 유씨를 재가시켜 [[사위]]로 삼기도 했다. 문덕왕후 유씨는 이미 [[왕족]] 인물이었던 [[홍덕원군]] 왕규에게 시집을 가 딸 1명을 낳는다. 문덕왕후 유씨가 낳은 딸은 [[목종(고려)|목종]]의 왕비 [[선정왕후]]이다 그리고 이후 성종과 재혼한다. 아들 [[경춘원군]](慶春院君)이 있었지만 너무 어려서《[[훈요 10조]]》3번 조항에 따라 동생 왕소가 대를 이었다. 경춘원군은 이후 전대 혜종의 아들 [[흥화군]](興化君)과 함께 광종에 의해 [[숙청]]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 알려진 사서의 기록과는 달리 [[박술희]]를 암살한 것도 정종이며, [[반란]]의 주동자로 알려졌던 [[왕규]]를 처형한 뒤 그에게 모든 [[죄]]를 덮어 씌웠다는 가설이 존재한다. 비록 왕규가 혜종 대에 반역을 꾀하고, 박술희를 모함하여 [[유배]]보낸 후 왕명을 사칭하여 유배지에 머물던 그를 살해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나 이를 곧이 곧대로 믿기는 힘들다. 왕규와 박술희 모두 태조의 유지를 받들어 혜종을 모시던 고명대신들이었기 때문이다. 왕규와 박술희는 특별한 문제가 있지 않는 이상 불화를 일으킬 사이도 아니었다. 그러나《[[고려사]]》<박술희 열전>에는 혜종이 병에 들자 100여 명의 [[호위]]를 이끌고 왕규와 대립했다고 적혀있으며, 왕규는 왕소와 왕요를 제거하고자 했는데 박술희는 이에 대해 반대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 서로 부족한 부분들을 보완해주는 정치적 동반자에 가까운 관계였으며, 단지 그 방식에 양자간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박술희는 몰라도 왕규는 조금 애매한데 왕규는 혜종에게 "[[정종(고려 3대)|왕요]]와 [[광종(고려)|왕소]]를 죽이자"고 간했으나 혜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왕소에게 딸을 [[시집]] 보내는 등 왕규의 뜻과는 다른 태도를 취했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자신의 딸을 왕소에게 [[출가]]시켜 그와 동복형인 왕요를 서로 분열시키려 한 것이 아니냐는 견해도 있다. 혜종의 뒷배경이 미약했고, 심지어 당대에도 혜종을 노리는 여러 번의 [[암살]] 시도가 있었다는 것을 감안해보면 [[생존]]을 위해 왕소와 왕요 형제 사이를 갈라놓으려 한 것으로 풀이해볼 수 있는 셈. 박술희는 [[후삼국]] 통일에 군공을 세울 정도로 녹록치 않은 인물이었지만 친위 무장의 [[성격]]이 강했기에 정치적 기반이 부족했고, [[광주시|광주]]의 [[호족(한국사)|호족]] 출신인 함규, 즉 왕규는 [[왕(성씨)|왕씨]] 성을 하사받고 대중 [[외교]]의 중책을 맡을 정도로 태조가 총애했던 인물이지만 기본적으로 [[문신]]이었기에 군사적 기반이 없었다. 때문에 왕규가 굳이 박술희와 혜종에게 위해를 끼칠 일이 없었다는 설도 있다. 혜종 사후 박술희는 정종이 [[역모]]를 의심해 귀양보냈고, 왕규는 왕명을 사칭해 박술희를 유배지에서 암살한 후 곧바로 왕요를 노렸지만 이미 기다리고 있었던 [[왕식렴]]과 왕요에게 당하고 만다. 이런 점에서 왕규는 박술희의 죽음을, 실제로 박술희를 왕명을 사칭해 암살했든, 아니었든, 왕요 탓으로 돌리고 박술희의 군사력을 흡수해 공격하려는 [[무리수]]를 두다 망한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혜종 및 박술희와는 달리 왕규는 대놓고 "왕소와 왕요를 없앨 것"을 간하는 등 그들을 [[타겟]]으로 삼고 있었기에 왕요의 [[국왕]] 즉위는 사실상 왕규에게 [[사형]] 선고나 다름없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